“떠날 거야.”
“예?”
이번에는 진짜 귀가 잘못 된 게 아닐까 생각해보는데 다시 한 번 동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재미도 있을테지.”
“아, 아씨 잠시만요. 혼인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으리께 말씀드려서 시집가신다고...”
“그래, 그랬지. 근데 아버지께 선수를 빼앗겼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귀동과 눈이 마주친 동희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보고 시집가란다.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허약한 놈팽이한테.”
“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와 귀동은 입을 막았다.
집만 아니라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도 부족할 것 같았다.
“아버지도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니니?
갑자기 시집가라고 하면 내가 네, 하고 갈 줄 아셨던건지...”
그건 아씨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며칠간 아버지는 혼사준비로 정신이 없으실 거야. 그때를 노려서 나가야지.”
“...아씨.”
“왜?”
동희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귀동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씨의 얼굴은,
그저 선하고 곱기만 했다.
그 속에 감춰진 속내를 아는 귀동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으리가 안 되셨어요.”
“진짜 안 된 건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시집가 평생을 썩힐 뻔 한 나야.”
“나으리는 아씨를 정말 사랑하세요.
분명 훌륭한 분이니 아씨와 이어주려고 하신 것 아니겠어요.”
귀동의 눈에 원망이 서려 있어 동희는 눈빛이 진지해졌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그녀라도 쌍둥이 동생 같은 귀동의 저런 눈빛엔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래. 아버지께서 고르셨으니 괜찮은 사람일 테지.”
눈물이 어릴 것 같은 귀동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동희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천하제일의 남자라도 나는 싫다.
나는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이 좋아.”
고집쟁이 아가씨.
이번에도 귀동은 아씨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어쩌시려구요?”
“멀리 외국으로 갈 거야.
아주 멀리. 코가 긴 동물이 있다는 신비한 나라까지 가볼 거야.
온 세상 돌아다니다가 서방님과 나를 꼭 닮은 아기 낳으면 돌아올 거야.
정에 약한 아버지도 당신 손주 얼굴보시면 허락하실 수밖에 없을 테니.”
“먼 곳까지 나가시려면 큰돈이 필요하실 텐데,
신랑 되시는 분이 준비가 되신 거예요?”
14살 어린아이라지만, 세상 돌아가는데 돈이 꼭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오히려 동희가 귀동보다 나이는 많지만 돈에 관한 관념은 희박할 것이다.
그녀는 돈이랑 공기처럼 당연히 제게 있는걸 당연히 생각하고 썼을 테니.
“내 신랑, 돈 한 푼 없는 가난뱅이야.
그렇지만 돈이야 내 쪽에서 넘쳐날만큼 많으니 상관없지 않니?”
“아씨께서 무슨 돈이...”
아무리 동희가 유복한 최진사댁 고명딸이지만,
그녀가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은 없었다.
고작 아비에게서 용돈 몇 푼 타서 쓰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동희의 얼굴에 서린건 자신감이었다.
어여쁜 얼굴이지만 어딘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음험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귀동은 설마 했다.
“설마, 아씨?”
“어머나. 역시 내 귀여운 귀동이. 눈치도 빠르다.”
“세상에. 어느 딸이 부모님이 준비하신 혼수를 훔쳐갑니까!”
“그건 아버지가 내 혼인을 위해서 준비하신 선물이야.
훔쳐 가는 게 아니라 당연히 가져할 사람이 가지는 거지.”
뻔뻔도해라!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한 말을 겨우 삼켰다.
이번일 만큼은 (사실 이번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숱한 사고들이 그랬지만)
아씨를 도와드리고 결심한 귀동이었던 것이다.
아씨를 도울 일만 생각하자, 귀동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돈은 내가 마련 할테니 너는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해주렴.
빠른 말도, 변장할 옷도, 비밀리에 묵을 숙소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확실히. 해줄 수 있겠니, 귀동아?”
귀동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똑 닮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 속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은밀한 음모를 꾸미는 순간, 문 밖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동희의 유모였다.
소중한 아씨의 혼인이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저 말썽꾸러기 아씨에겐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의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함이 나오려는걸 꾹 참고 동희의 야심찬 계획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주름진 눈동자가 두 사람에 비할 대 없이 결연하다는 걸 동희와 귀동은 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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